고난 속에 드러난 주님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첫째, 연약한 자를 붙드시는 사랑입니다.
54절에 예수님께서 체포되시던 순간,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에 휩싸여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이 순간 예수님이 베드로를 바라보십니다. (61절)
이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눈길은
정죄의 눈길이 아니라, 회복의 눈길이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그 실패를 아셨지만,
베드로를 포기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가 다시 회복되고 일어서기를 바라는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에도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왜 실패했느냐”가 아닌
“다시 나를 사랑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주님의 시선은 비난이 아니라 사랑이며,
연약한 자를 다시 세우시는 회복의 시선입니다.
베드로를 다시 세우신 주님은 우리도 다시 세우십니다.
이 놀라운 주님의 사랑 앞에 우리 자신을 내어놓고,
다시 주님의 손 붙잡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죄인을 위해 침묵하신 사랑입니다.
63~65절에 예수님은 조롱과 폭행을 당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에 반응하지 않고 끝까지 침묵하십니다.
예수님은 왜 침묵하셨을까요?
바로 우리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침묵을 이미 예언했고,
예수님은 그 말씀을 이루셨습니다.(사 53:7)
이는 무기력한 침묵이 아니라,
죄인을 위한 의도적이고 능동적인 사랑의 표현입니다.
당신이 짓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쓰고,
당신이 겪지 않아도 되는 조롱을 참고 견디셨습니다.
이 주님의 침묵은 무기력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위해 이 고난을 받는다”는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이 침묵 앞에서 회개로 응답해야 합니다.
“주님, 그 침묵이 나 때문임을 압니다.
그러니 내가 다시 주님 앞에 바로 서겠습니다.”
이 고백이 회복의 시작이며,
이 사랑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죄인을 위해 침묵하신 주님의 사랑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원수를 위해 죽으신 사랑입니다.
67-71절에 예수님은 공회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지만,
그들은 이를 신성모독으로 정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오해와 정죄 속에서도
그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분노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십니다.
예수님은 제자와 따르는 무리만을 위한 구세주가 아닙니다.
자신을 조롱하고 정죄하는 원수조차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해 죽으십니다.(롬 5:8)
고통스러운 십자가에서조차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기도하십니다.(눅 23:34)
이것이 원수를 위한 사랑이며,
십자가는 그 사랑의 가장 큰 증거입니다.
우리도 그 사랑을 기억하며
원수까지 품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을 깊이 품고 원수 같은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의 사랑을 따가겠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